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라쿠스 형제 (문단 편집) == 형제의 동기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 법안을 둘러싼 싸움을 단순히 티베리우스 진영과 로마 원로원간의 권력 투쟁으로 묘사한 학자들이 많았다. 이 학자들의 눈에는 티베리우스가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움직인 민주적·자유주의적 혹은 급진적 개혁자로 비치고, 원로원은 로마의 사회·경제적 문제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부유한 토지 귀족들로 비쳤다. 이 견해는 오래 버틸 수 없다. 티베리우스는 급진적 개혁을 염두에 두고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으로서, 언제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 의존했던 군 병력 자원을 되살리고,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는 대농장의 확산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티베리우스를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방대한 토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그의 행동을 자신들이 순수하게 믿고 있는 '정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또 개인과 계파의 정치에 근거하여 그를 반대한 의원들도 있었다. ······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집행하도록 구성된 농지 분배 위원회가 그 입안자의 사후까지도 활동을 허용받은 것은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에 대해 조성되었던 반감이 주로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나 편협한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기초를 두지 않고 개인적이고 파벌적인 정책에 기초를 두었음을 암시하는 또 한 가지 점이다.''' 개혁으로부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거둘 뻔한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더 이상 그의 정적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은 이번에는 그들이 자진해서 호의(gratia)를 베풀고 토지를 분배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수의 피호인들을 확보했다. 콘술 포필리우스 라이나스(Popilius Laenas)는 심지어 자신이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 했던 일을 자랑했다. 그는 루카니아의 지계석(地界石)에 자신이 "목동들로 하여금 농부들을 위해 길을 내주도록 만든 최초의 인물"이라는 글귀를 새겨넣게 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임명된 농지 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티베리우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던 폴비우스 플라쿠스(M. Fulvius Flaccus)와 파피리우스 카르보(C. Papirius Carbo)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6년만에 7만5천 명이 넘는 인구를 정착시킨 듯한데, 그것은 군 복무가 가능한 병력 자원을 20% 늘린 셈이었다.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일시적으로 성취한 듯하다. > ······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뒤에 넓은 의미에서 귀족파로 분류할 수 있는 그의 정적들은 한때 그가 자신들을 누르는 대가로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그의 법을 시행할 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곡물법을 폐지하지도 않았고, 부당취득재산 반환청구 법정에 선정된 배심원들을 교체하거나 속주 세금 행정 체제도 수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 설립과 관련된 법을 포함한 농지법도 비록 수정은 했으나 폐기하지 않았다. >----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전통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은, 기득권층의 특권을 박살내려는 그라쿠스 형제와, 개인적이고 편협한 동기에 사로잡힌 기득권층의 대립으로 이해되었다.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하이켈하임이 지적하였듯이, 근래에는 씨족의 디그니타스(dignitas, 존엄)을 높이려던 청년 귀족 그라쿠스 형제의 야심 및 정치적 이해관계와 그들 내부의 고결한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된다. 형제의 아버지는 집정관을 두번이나 지냈고, 두번의 개선식을 거행했고, 히스파니아에서는 존경 받는 총독이였고, 감찰관을 지냈으며, 존경받는 복점관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아버지의 디그니타스를 재현하거나, 혹은 뛰어넘으려는 전통적인 로마 엘리트의 마음에서 바라볼 때 형제들의 동기는 더욱 쉽게 이해된다. 특히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형제들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졌던 사적인 관계이다. 하이켈하임은 이 점을 특히 주목한다. 아이밀리아누스는 형제들의 친척이였으며, 티베리우스의 정채적 행보 초기에는 아이밀리아누스와의 친족 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티베리우스의 가족과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는 그들의 복잡한 인척 관계로 인해 생긴 유산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악감정이 쌓여있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티베리우스의 누이였던 셈프로니아의 남편이였으나 이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되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티베리우스가 카르타고에서 귀환한 후 2~3년 뒤에 귀족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스키피오의 큰 정적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과 약혼하게 되어서 기름을 부었다. 또한 BC 137년에 티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C. Hostilius Mancinus)[* 그의 가까운 친척인 L. Hostilius Mancinus가 아이밀리아누스의 정적임.] 밑에서 재무관(quæstor)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만키누스가 누만티아군에게 패배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자신과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명예를 걸고 누만티아군과 맺은 평화협정을 스키피오가 앞장서서 무효화하고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누만티아를 파괴하여 티베리우스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 다시말해,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최소한 티베리우스)는 이웃보다도 더 웬수 같은 친척이였던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아이밀리아누스의 평화협정 거부는 그와 티베리우스의 관계가 파탄이 났음을 말해준다. >스키피오는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만키누스뿐 아니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정치 생명까지도 희생시킬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스키피오에 대해서 공정히 말하자면, 그는 티베리우스가 만키누스와 같은 운명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왔지만, 그 사건을 전체로 놓고 보면 티베리우스의 신망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셈이 되었고, 따라서 티베리우스로서는 일가 사람 시늉을 하려고 한 스키피오의 어설픈 행위를 조금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고, 아울러 두말할 나위 없이 스키피오를 응징할 수단을 필사적으로 찾게 되었다. 농지 개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특히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의 디그니타스를 처절하게 찢어놓았고, 따라서 그의 디그니타스를 복구하기 위해 과감한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사적인 이해관계 및 정치적 야망과 그의 고결한 성품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지법이라는 폭풍을 부르게 된다. 우선, 농지법을 시행하게 되면 당연히 로마가 당면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민관 출마를 앞두고 있던 티베리우스에게는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여 표를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였으며, 시행에 성공할 경우 부동의 지지층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농지법이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농지 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에서 귀국하면 자신의 전역병들에게 보상해야 할 '바로 그 토지'를 아이밀리아누스가 아니라 농지 위원회가 분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이밀리아누스의 피호인이 티베리우스의 열렬한 지지자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는 크나큰 타격이다. 다시 말해, 농지법은 정의로우면서도 동시에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에게 유익한 개혁이였던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티베리우스의 사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위에서도 인용했듯이, 농지 위원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업무를 중단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했다. 아직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지지자를 확보하여 줄 농지법 프로젝트를 엎어놓지 않았고, 심지어 티베리우스의 가장 큰 정적이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동맹국 시민들이 자기들에게도 공유지의 혜택을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혼쾌히 수락하고 농지법의 동맹국 혜택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그러므로 원로원이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반대한 것에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붕괴된 농지법을 부활시킨' 인물로 바라보기보다는, 티베리우스 사후에도 유지되어온 농지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티베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지지자를 흡수한 인물로 바로봐야 할 것이다. 가이우스의 광범위한 개혁의 동기는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정의'와 '정치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엮여있고, 여기에다가 티베리우스의 사망으로 인해 찢어진 가문의 디그니타스를 회복하려는 동기도 있다. 티베리우스를 살해할 때 그의 정적들은 티베리우스가 참주가 되려고 한다며 고소하였고, 참주는 처형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옛 법을 근거로 그를 살해하였다. 물론 티베리우스가 공화정을 뒤엎고 참주가 되려고 했다는 근거는 없으나, 당시 그의 정적들이 어마어마한 민중 지지자를 확보해나가던 티베리우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의 정적들이 오직 단 하나 '기득권 옹호'만으로 움직였다고 바라보기보다는, 여러 요인을 함께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정적들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을 것이다. 가이우스의 사후 농지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본다면, 역시 이 주장은 더더욱 힘을 얻는다. >세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제정된 법들이 그라쿠스의 농지법과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이해에 맞춰 점차 수정했다. 기원전 121년에 제정된 듯한 첫째 법은 정착민들에게 자기들이 할당받은 농지를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법은 군 복무를 위한 재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부유한 토지 소유자에게 주변의 작은 토지들을 사들이거나 강제 매각하도록 허용하려는 목적을 무산시키는 경향을 띠긴 했지만, 반드시 인기가 없지만은 않았다. 소규모 토지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상속자들에게 더 작은 토지로 분할해 준다면 생계 유지는 더욱 힘겨운 일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정착민들은 그것을 팔아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다. >두번째 법(아마 기원전 118년에 제정됨)은 농지 분배 위원회를 해산하고(그 위원회의 임무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에 대한 더 이상의 분할을 중단하고, 국가에 소액의 지대를 지불한 대가로 이미 분배된 토지에 대해 법적 소유를 보장했다. 이 법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과 소규모 소유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특별히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더 이상 분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11년에 세번째 법(비명<碑銘>에 부분적으로 보존된 토리우스 법(lex Thoria>인 듯함)이 제정되어 기원전 118년의 법에 의해 지시된 모든 임대 행위를 폐지하고, 그라쿠스 농지 분배 위원회에 의해 320에이커까지 분배된 모든 공유지를 사유 재산화하고, 식민 도시들과 자치 도시들에게 이미 준 토지를 안전히 보유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아울러 이 법은 공공 방목지를 더 이상 잠식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가축의 수효를 엄격히 규제했다. 지대 경감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와 소규모 소유자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고, 자치 도시들의 동맹국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하사된 토지의 안전한 보유권에 대해서 감사히 여겼다. 소규모 자영농들은 대규모 지주들이 부가적인 공유지를 불법으로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조치를 환영했을 것이며, 소규모 목축업자들은 목조지를 못쓰게 만드는 과잉 방목의 규제조치로 인해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